- 줄거리 요약: 잘못한 게 없는 소녀가 왜 도망쳐야 했나
- 내 경험: 피해자가 숨어야 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
- 평점 및 비평: 천우희가 청룡을 가져간 이유, 그 연기의 무게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요." 이 한 마디가 영화 내내 공주의 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도망칩니다. 말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그냥 숨습니다.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2014)는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입니다. 그러나 가해자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도망쳐야 했던 열일곱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부산국제영화제 CGV무비꼴라주상·시민평론가상, 마라케시 국제영화제 금별상,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타이거상을 수상했고, 독립영화 최단기간 최다 관객 기록을 세운 작품. 지금 들여다보겠습니다.

줄거리 요약: 잘못한 게 없는 소녀가 왜 도망쳐야 했나
열일곱 살 한공주(천우희)는 갑자기 전학을 가야 합니다. 이유는 영화 초반에 직접 설명되지 않습니다. 낯선 도시 인천, 선생님 어머니가 운영하는 편의점에 얹혀살며 새 학교에 다닙니다. 공주는 조용합니다. 눈에 띄지 않으려 합니다. 친구를 사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같은 반 친구 은희(정인선)가 먼저 다가옵니다. 수영을 잘하는 공주를 발견하고, 학교 수영부에 들어오길 권합니다. 공주는 처음엔 거부하지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노래도 다시 시작합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전 학교 학부형들이 공주를 찾아 학교로 들이닥칩니다. 영화는 그제야 공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보여줍니다. 집단 성폭행의 피해자였던 공주. 잘못한 게 없는데, 고향을 떠나야 했고, 숨어야 했고, 이름도 바꿔야 했던 소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도망치는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내 경험: 피해자가 숨어야 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
〈한공주〉를 본 건 마흔 즈음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공주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아는데, 공주가 계속 도망치는 걸 보면서 그 분노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2024년, 밀양 사건 가해자 중 한 명이 딸까지 낳은 채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맛집에서 일하고 있다는 게 알려졌을 때, 이 영화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피해자는 평생 도망치며 살아야 했을 텐데, 가해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고 있었다는 것. 영화가 현실보다 더 따뜻했습니다. 현실이 더 가혹했으니까요.
공주가 수영장에서 혼자 잠수하는 장면이 오래 남았습니다. 물속에서만큼은 아무도 자기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장면이 너무 슬펐어요. 열일곱 살이 물속에서 숨을 참는 게 유일한 안식이어야 한다는 게. 마흔이 넘어서 보니까 그 감각이 더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평점 및 비평: 천우희가 청룡을 가져간 이유, 그 연기의 무게
, 최종 누적 관객은 22만 4,452명이었습니다. 씨네21 전문가 별점 7.33, 관객 별점 8.26점을 기록했습니다.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인 성과였습니다. 그리고 천우희는 이 영화로 제34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시상식에서 본인도 몰랐는지 당황해하다 눈물을 흘리며 수상 소감을 전했습니다.
비평가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건 연출의 절제입니다. 성폭행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공주의 행동과 표정을 통해 과거를 역추적하게 만드는 방식이 성숙하다는 평가입니다. 이수진 감독은 피해자를 전시하지 않으면서,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무게를 정확하게 담아냈습니다. 천우희의 연기는 말 그대로 전부입니다. 웃음도, 눈물도, 침묵도 전부 공주라는 인물로 느껴집니다.
다만 아쉬운 지점도 있습니다. 비선형 서사 구조가 초반에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또한 가해자들과 그 부모들의 행동이 다소 도식적으로 그려진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피해자의 내면에 집중한 나머지, 가해자 측의 입체성이 부족하다는 시각이죠.
왓챠와 웨이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영화입니다. 그래도 봐야 하는 영화입니다. 공주의 이야기가 과거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공주〉를 보고 나서 한동안 멍했습니다. 공주가 마지막에 물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잘못한 게 없는데 도망쳐야 했던 소녀. 그 소녀가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영화는 불편하게 만들고, 그 불편함이 오래 남습니다. 〈한공주〉가 딱 그런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