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거리: 집을 버린 여자, 취향은 버리지 않았다
- 내 경험: 나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켰나
- 평점과 비평: 가장 급진적인 독립영화의 탄생

"담뱃값이 올랐다. 그래서 집을 버리기로 했다." 이 한 문장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이게 제일 솔직한 말처럼 느껴집니다.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2018)는 집도 돈도 없지만 위스키와 담배와 남자친구만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가사도우미 미소(이솜)의 이야기입니다. 씨네21이 2018년 올해의 독립영화로 꼽은 이 작품, 왜 지금도 회자되는지 직접 들여다보겠습니다.
줄거리: 집을 버린 여자, 취향은 버리지 않았다
미소(이솜)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서울에서 월세방에 살고 있습니다. 수입은 많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세 가지 확실한 낙이 있습니다. 퇴근 후 홀짝이는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개비, 그리고 밴드 활동을 같이하던 남자친구 한솔(안재홍). 그런데 어느 날 담뱃값이 오릅니다. 위스키를 포기하느냐, 집을 포기하느냐. 미소의 선택은 집이었습니다.
집을 나온 미소는 대학 시절 밴드 동료였던 친구들의 집을 하룻밤씩 전전합니다. 그런데 친구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취업에 성공했지만 야근에 치여 사는 친구, 결혼했지만 고부갈등으로 지쳐 있는 친구, 꿈을 좇다 현실에 타협한 친구. 저마다 집은 있지만, 저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얼굴들입니다.
미소는 그 사이를 떠돌면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지만,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 대비를 통해 질문을 던집니다. 집이 있다고 해서 자기 삶을 사는 걸까. 집이 없다고 해서 자기 삶을 잃은 걸까.
내 경험: 나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켰나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사회초년생 시절이었습니다. 월급의 절반 가까이가 월세로 나가던 때였습니다. 취미로 다니던 사진 수업을 끊어야 할지 고민하던 시기였고, 결국 끊었습니다. 돈을 아껴야 했으니까요. 그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미소가 담뱃값이 올랐다는 이유로 집을 버리는 장면을 보면서, 뭔가 잘못 생각했던 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미소는 취향을 지키기 위해 불편을 선택했고, 저는 편함을 지키기 위해 취향을 포기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자기 삶을 사는 사람인가. 영화가 직접 답을 주지는 않지만, 그 질문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뭔가를 포기해야 할 때 미소를 떠올립니다. 정말 이게 포기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지켜야 할 것인지. 거창한 기준이 아니라,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를 먼저 묻게 됐습니다. 영화 한 편이 그런 습관을 만들어줬습니다.
평점과 비평: 가장 급진적인 독립영화의 탄생
〈소공녀〉는 2018년 3월 개봉 이후 독립영화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작이 됐습니다. 씨네21 기자와 평론가들이 뽑은 2018년 올해의 독립영화로 선정됐고, 전고운 감독은 신인감독상을 받았습니다. 네이버 영화 평점 8.6점, 당시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인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관객과 비평 모두에서 인정받았습니다.
비평가들은 특히 이 영화의 태도를 높이 평가합니다. N포 세대의 현실을 다루면서도 비참하거나 무겁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머가 있고, 미소는 씩씩합니다. "다 버리고 최소한의 것만 챙겨서 떠돌아다니는 가난뱅이 오타쿠의 세대가 열렸음을 선포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대표적입니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던 시기에, 그 개념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영화이기도 합니다.
다만 비판적 시각도 있습니다. 미소의 선택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입니다. 실제로 집 없이 친구 집을 전전하는 삶이 영화처럼 낭만적일 리 없다는 것이죠. 또한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이 미소를 온전히 이해하고 지지하는 방식도 다소 도식적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현실의 관계는 그렇게 깔끔하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소공녀〉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집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 번도 불쌍하지 않았고, 가난한 이야기를 하면서 한 번도 초라하지 않았습니다. 그 태도가 이 영화를 단순한 독립영화 그 이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소공녀〉를 보고 나서 한 가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끊었던 사진 수업이었습니다. 월세방이 조금 더 좁아졌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미소가 집을 버리면서까지 위스키를 지킨 것처럼, 저는 월세 몇만 원을 더 내면서 사진을 지켰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것, 그리고 그걸 선택하는 용기. 이 영화가 조용히 건네준 가장 큰 선물입니다.